벌써 1년이 지났네요.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매월 연합기도회가 열렸는데, 6월 기도모임의 주제는 교육이었습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송인수대표님과 함께 메신저로 초청받아 짧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메시지 전문, 관련기사와 동영상을 옮겨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저는 갓 20대가 된 딸과 한창 사춘기인 아들을 기르는 엄마입니다. 청소년들에게 1년의 방학을 선물하는 갭이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모로서 교육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23살 청년이 “다음 생에는 공부 잘할게요. 미안해요.” 문자를 남기고 잠실대교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뉴스를 보고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그리고 슬펐습니다. 공부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누군가의 삶을 포기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걸까요. 그 청년은 고졸로서 반도체 회사에 다니다가 실직했고 재취업하려고 애썼지만 잘 안되었답니다. 배낭여행 다녀오느라 진 수백만 원의 빚 때문에 괴로워했답니다. 청년의 죽음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공고한 학벌주의, 청년실업 문제의 민낯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안타까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픔은 다 잊고, ‘그러니까 공부 잘해서 무조건 좋은 대학 가야 한다’고 자녀들을 다그치는 근거로 쓰지는 않을지 걱정도 됩니다. 이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이죠.

 성적 때문에 부모·자녀 사이에 미움이 싹트고, 성적 때문에 아이를 학대하고, 성적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비일비재합니다. 학원보강 때문에 주일예배도 빠지고, 방학 때는 선행학습을 해야 하니까 수련회도 안 보냅니다. 아니 못 보냅니다. 저녁밥은 학원 옆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대신합니다. 학원숙제 하느라 못 잔 잠을 학교에 가서 보충합니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들해져 갑니다. 빛을 못 보고 물을 못 먹은 화초처럼 축 쳐져 있습니다. 생기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기 위해서 마땅히 공급받아야 할 것들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뛰어놀 시간, 뒹굴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힘든 마음을 보듬어주는 사람도 없어서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각자도생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하느라 부모도 너무 바빠서 말입니다. 부모들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병들어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세상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이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단 한 가지 이유, 즉 공부 때문에 형편없는 존재로 평가절하당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성적만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아이들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깨달아가는 진정한 배움의 기쁨도 알고, 친구랑 놀면서 우정을 쌓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주말의 여유를 즐기며 행복감을 만끽해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기르며 불안해하며 오락가락할 때 부모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아이를 충만한 생명으로 살게 하는지 아니면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결정의 일차적 책임이 부모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선택하면 그곳에 생기가 있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성장이 있습니다. 그 성장에는 불안과 염려가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기가 처음으로 뒤집었을 때, 처음 옹알이했을 때, 자기 이름 석 자를 삐뚤빼뚤 그렸을 때, 뿌듯하게 차오르던 기쁨. 부모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시기마다 보여주는 이런 작은 발전들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 경우, 그런 설렘이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가져온 수학시험지의 좍좍 그어진 수많은 빨간 작대기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요. 그런 점수를 받아온 주제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아이 뒤통수가 미워졌습니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제 마음이 지옥이 되었습니다. 학생이니까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차피 할 거면 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 경탄이 사라진 것입니다. 경탄이 사라지니 그 빈자리를 찾아오는 것은 바로 불안이었습니다.

 제가 관찰하건대, 이 세상에는 생명이 이끄는 양육이 아니라, 부모의 불안이 이끌어가는 양육이 지배적입니다.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자녀를 위해 대비해야 할 일이 많아집니다. 부모 역할이 과다해집니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다를까요? 자녀를 위한 어머니들의 기도에 꼭 들어가던 문장이 있지요.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성공 주의, 번영 주의에 물든 저급한 신학이 한국교회뿐 아니라 이 나라의 교육문제에도 여지없이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과잉양육이란 ‘믿음 없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불안한 마음 밑에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부모의 욕망과 불안이 하나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아이의 주인 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아이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태초부터 그 아이를 계획하셨고, 앞으로도 아이 손 잡고 친히 이끌어가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 노릇 하는 부모, 힘없는 아이 앞에서 갑질하는 부모만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힘센 엄마 아빠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수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족을 모른 채 끊임없이 채찍질하던 애굽의 왕들은 노예들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조금 더 일하면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기근을 대비하기 위해 노예들을 착취했습니다. 거대 산업구조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아이들도 그 당시 노예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더 열심히,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라는 요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그쳤던 채찍과 같습니다. 그리고 6개월 이상 심지어 3년까지 앞서가는 선행학습을 하게 하는 것은 명백한 공부‘착취’라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아이들의 경주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거대한 물결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함께 휩쓸려가야 합니까. 많은 부모가 그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이 안됐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러면 아이들을 주말도 휴일도 없는 공부 기계로 살게 할 것입니까?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의 작은 기쁨을 모두 생략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쓸데없이 지치게 하는 이 환경을 비정상적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친구를 경쟁상대자로 인식하게 하는 몹쓸 환경을 비인간적이고 나쁜 환경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고쳐나가는 운동에 함께 동참하면 됩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아이를 보호하는 단순한 결단을 자주 하면 됩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할 때 그것을 안 하면 되는거죠. ‘40년 넘게 살아보니 시험점수 1, 2점에 인생이 좌우되는 건 아닌데’라고 생각한다면 아이 성적 떨어졌다고 닦달하지 않으면 되고, ‘하루에 학원 세 개 가면 놀 시간이 없는데. 이건 좀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 아이와 의논해서 꼭 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나머진 끊으면 되는 겁니다. 생각보다 쉽습니다. 우리도 종일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면 손 까딱 안 하고 쉬고 싶지요. 주말이 되면 늘어지고 싶구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방과 후를 방과 후답게, 주말을 주말답게, 방학을 방학답게 보낼 수 있게 해줘야겠지요.

 그렇게 놀 거 다 놀고 쉴 거 다 쉬면 아이가 바보 될까 봐 솔직히 걱정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애써 외면할 뿐이지요. 오히려 사람은 잘 쉬고 나면 에너지가 충전되어 움직일 힘이 납니다.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생기가 돌아옵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한 딸에게 통 크게 방학을 1년씩이나 선물한 것은 이런 작은 결단들을 실행에 옮기면서 조금씩 쌓인 힘 덕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려면 결국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거스른다는 것은 곧 남들이 걷지 않는 좁은 길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결정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쉬고 뒹굴거리는 것 같은, 그 시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들을 거스르고 저항해야 겨우 쟁취할 수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삶의 여백을 가진 아이들이 자기 모습대로 잘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대로 때에 맞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도와주라고 아이들 곁에 보호자로서 부모를 두셨다고 믿습니다.

 자녀 교육영역은 그 믿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그 믿음이란 아이가 무조건 잘 될거야 라는, 부모의 욕망에 근거한 맹목적 믿음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아이를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사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안이라는 감정은 시시때때로 찾아옵니다. 윌리암 메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다움이란 불완전한 아이의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다움이란 우연의 미래로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라고요. 불안 가운데 겨자씨만한 믿음 한 톨을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이 부모의 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3년 전, 꽃 같은 어린 생명 250명을 잃었습니다. 그 해에 제 딸도 수학여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별이 된 아이들과 같은 학년이라서 더욱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열일곱 해를 애지중지 키운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들은 세상 전부를 잃은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유례없는 참사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선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 부모의 기대는 매우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부모들은 그 첫 기도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 학원을 끊겠다고 선언했고,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등교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꼭 끌어안아준다고 했습니다.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다른 것은 요구하지 않을게’라며 엄마의 고백이 순수해졌습니다. 욕망이 제거된 순수한 마음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용기가 발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왜 독생자를 내어 주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주셨을지 생각해봅니다. 우리를 갉아먹는 지독한 경쟁적 삶에 순응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일까요? 우리 자녀들까지도 그 경쟁에 내던지는 것이 구원받은 부모들의 마땅한 선택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안식과 평안함이 전혀 없다면 질문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폭주를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안식은 저항이며, 저항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히10:39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서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아멘


기사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1808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cGbF3sJ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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